
첫 골짜기, 새벽빛이 숲결에 스미니
어머니 숨결 같은 이슬이 솔잎 끝에 맺히고
대숲 사이 햇살이 가만히 들창문 열어젖힌다.
둘째 골짜기엔 바람이 묵은 노래를 부른다.
백 년 금강송 가지 끝에서 푸른 향이 번지고
그 향에 취한 나그네 발걸음, 한참을 머문다.
셋째 골짜기 물소리, 깊고도 맑아
돌 위에 흩어진 시절들을 씻어 보내고
가슴 속 울음마저 다려서 하늘로 띄운다.
넷째 골짜기엔 대나무 그림자 천 겹이라
한 겹은 젊음의 푸름, 한 겹은 세월의 비늘
바람결마다 사철의 이야기가 출렁인다.
다섯 골짜기, 낙엽이 천천히 깔리니
그 위를 걷는 발자국이 오래된 책장을 넘기고
한 줄 한 줄마다 누군가의 사연이 묻어있다.
여섯 골짜기, 비 갠 뒤 흙내음이 그윽하여
코끝에 머문 순간, 유년의 골목이 열리고
빗방울 굴러간 기억들이 반짝이며 웃는다.
일곱 골짜기, 안개가 허리를 두르니
숲은 깊은 사찰처럼 숨죽여 앉아 있고
그 고요를 마시는 나, 속세의 먼지를 내려놓는다.
여덟 골짜기, 매미와 새가 서로 부르며
여름과 가을이 한길에서 맞부딪히고
그 울림에 계절의 경계가 부드럽게 풀린다.
아홉 골짜기, 해넘이 붉게 번지니
하루가 저물어도 이 숲은 여전히 숨쉰다.
세대를 건너 온 숨결이 나를 끌어안는다.
아홉 골짜기 품은 숲이여,
네 뿌리는 백 년의 물결에도 쓰러지지 않았고
네 잎새는 천 번의 바람에도 찢기지 않았다.
인간의 손길이 멈춘 사이,
너는 네 안에 계절을 키우고
낙엽 속에 생을 묻고 다시 봄을 틔웠다.
나는 너를 지나며
이름 없는 풀꽃의 작은 기도를 듣고
기억의 바닥에서 오래 잊은 얼굴을 만난다.
아홉 골짜기 품은 숲이여,
네 품은 깊어 사람의 언어로 다 전할 수 없으니
다만 나, 발걸음을 늦추어 숨을 맞추고 싶다.
그리하여 오늘 내 마음도
너의 한 그루 나무처럼 뿌리 내려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생이 되리.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립다, 여름 밥상... (84) | 2025.08.13 |
|---|---|
| 붉은 심장... (80) | 2025.08.12 |
| 8월의 숨결... (80) | 2025.08.08 |
| 무궁화여, 이 강산의 심장을 안고 피었느냐... (107) | 2025.08.06 |
| 풍경의 자리... (66) | 2025.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