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바람은
언제나 보리밭부터 찾아온다.
햇살은 조용히 이랑에 내려앉고
연둣빛 보리들이
손짓하듯, 속삭이듯,
가볍게 몸을 흔든다.
나는 그 바람을 따라
오래된 고갯마루를 넘는다.
누군가의 발자국이 스며든
좁은 흙길,
그 길엔 낡은 기억들이
풀잎처럼 조용히 피어 있다.
지푸라기 냄새,
햇볕에 데워진 흙냄새,
오래된 마루처럼 따뜻한 바람이
코끝에 머무른다.
그 순간,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손, 아버지의 뒷모습이
가만히 마음속에 떠오른다.
보리밭은 아무 말 없지만
그 안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어린 날, 누이와 소꿉놀이하던 낮,
아버지가 새참을 들고 오던 저녁,
해 질 무렵 손잡고 걷던 길목.
모든 장면이 지금도
그 자리에서 바람을 기다리는 듯하다.
노을이 들판에 내려앉으면
보리는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 속엔 잊었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난다.
그리움이라는 말로는
다 닿을 수 없는
따뜻한 울림이 마음속 깊이 번진다.
바람이 불어오면
보리는 서로 부딪히며 조용히 말한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를 알아보는 그 눈빛처럼.
“잘 있었니?”
“그 자리에 그대로였구나.”
“나도 너를 잊지 않았어.”
나는 한참을 서서
그 물결을 바라본다.
그 안에는 어린 내가 있고
젊은 엄마, 젊은 아빠가 있다.
그들은 아직도
저 보리밭 언저리에서
햇살을 등지고 앉아 있다.
바람을 들으며, 잠시 쉬고 있다.
보리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데려간다.
마치 내가 찾아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잃어버린 마음 한 조각을
조용히 건네는 듯하다.
길가엔 작은 풀꽃들이 피어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햇살 아래 조용히 눈을 감은 고양이 한 마리.
모두가 말해준다.
“여긴 잊지 않아도 되는 곳이야.”
어느새 나는
기억 속 가장 따뜻한 부분을 걷고 있었다.
한때는 스쳐 지나간 풍경들이
이제는 마음속 가장 선명한 빛이 되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다시 걷는다.
아직 바람은 불고,
보리는 흔들리고,
길은 어디론가 이어져 있다.
그저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언젠가 또
이 길을 걷게 되겠지.
그때도 보리는 이랑 위에서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기억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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