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용궁사 처마에 말을 건넨다
어쩌면
오래전 떠난 누군가의 인사일지도 모른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기억하지 못한 마음이
그 빗방울에 실려 돌아온다
단청이 젖고,
지붕 틈새로 물이 스민다
산허리에 흐릿하게 걸린 안개는
마치 누군가의 한숨 같아
괜스레 고개를 숙인다
나는 오늘,
그냥 이 비를 맞고 싶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눈 마주치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
여기, 이 절의 처마 밑에서
나는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청량한 젖은 흙냄새를 데려온다
기와 위로 또르르 미끄러지는 빗소리
그 사이사이에
나는 오래전 잃어버린 대답을 듣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누군가 속삭이듯
떨어지는 그 한 방울에
나는 조금씩 풀려간다
굳어 있던 어깨가,
굳어 있던 생각이,
천천히 풀린다
용궁사,
세상 끝에 숨어 있는 작은 고요
불빛도 없이 환한 그 자리
내가 꼭 필요했던 순간에
이 비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무슨 기도를 하지 않아도
무슨 해탈을 바라지 않아도
그저 이 풍경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어디선가
나를 쓰다듬는 마음이 느껴진다
가끔은
누군가의 말보다
한 줄기 빗소리가
더 깊이 위로가 된다
가끔은
떠나가는 것보다
잠시 머무는 것이 더 큰 용기다
처마 끝에서 머뭇거리던 빗방울이
이제는 스르륵,
내 손등으로 내려온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
딱 지금 내 마음 같아서
괜히 웃음이 난다
누구도 오지 않는 이른 아침,
이곳엔 오직 비와 나,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다
지난 계절도,
쌓인 말들도,
잠깐 이 빗속에 놓아두기로 한다
멀지 않아 해가 들겠지
그러면 다시 걸어 나가야겠지만
그 전까진 조금 더,
이 조용한 처마 밑에 머물고 싶다
그래도 되는 날도
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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