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야,
가끔은 그런 게 있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작고 낡은 것에서
너와 나의 시간이 조용히 깨어나는 순간 말이야.
오늘은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손가락 한 마디쯤 남은 연필을 하나 발견했어.
몽땅 연필.
더는 깎을 수조차 없는 짧은 연필이었지.
그걸 쥐는 순간,
괜히 네 생각이 나더라.
그때 우리,
연필 하나를 끝까지 쓰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
짧아진 연필을 손가락 끝으로 쥐고
손바닥이 시커멓게 되도록 글씨를 써내려가던 날들.
가끔 너는
연필 끝에 다 쓴 볼펜 대를 껴서 쓰곤 했지.
볼펜 껍데기 하나로
연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으려 했던 너.
그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론 괜히 울컥하기도 해.
우리는 그 시절
부족함을 창의력으로 버무려 살았어.
가진 건 적었지만
그 적음 속에서 나름의 방법을 찾아가던 너와 나.
그 몽땅한 연필을 쥐고 있으면
자세도 자꾸 숙여졌고,
책상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게 되곤 했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짧은 연필 하나에 담긴 생각들은
어느 때보다 단정하고 또렷했던 것 같아.
나란히 앉아
산수 공책을 펴고
지우개 가루 날리며 문제를 풀던 오후들.
덧셈이 어렵고 뺄셈이 복잡했던 시절이지만
마음만큼은 지금보다 훨씬 단순하고 환했지.
이제 우리는
삶의 정답을 구하기보다
물음표 곁을 맴도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 시절,
한 자루의 연필은
우리가 얼마나 똑바로 살아가려 했는지를 보여줬어.
몽땅 연필은
결국 다 닳아 없어져도
어딘가에 또 쓰임이 있을까 봐
너는 종종 다 쓴 볼펜 대에 껴서
서랍 한쪽에 조심스레 모아뒀잖아.
그 작은 정성이 지금은
참 크게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너를,
그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조용한 시간을
짧아졌지만 더욱 귀해진 마음으로 꺼내어 본다.
세상이 너무 무거워서
어떤 말도 제대로 새겨지지 않을 때,
가끔 너랑 주고받던 낙서,
산수 공책 귀퉁이에 그려 넣던 웃는 얼굴 하나가
문득 위로처럼 다가와.
혹시 너도 그런 날이 있니?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다가
점점 희미해지는 마음.
그래도 괜찮아.
우린 몽땅 연필 하나로도
세상을 그릴 줄 알았던 사람들이잖아.
그 짧은 연필로 찍은 별표,
그 별 안에 숨겨진 작은 꿈들,
그리고 너라는 이름.
비록 닳고 흐려졌을지라도
내 마음속에선 여전히 또렷해.
나도 이제
몽땅 연필처럼 작아질 때까지
어느 날은 굵게, 어느 날은 가늘게
조심스레 살아보려 해.
끝이 가까워져도
쓸 수 있는 문장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그 연필이 가르쳐줬거든.
그리운 너에게,
이 오래된 마음을 전하며.
늘, 너의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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