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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물길 위에 심은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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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초록이 줄을 섰다
햇살에 등을 돌리지 않고
바람에 고개를 떨구지도 않은 채,
작은 모들은 고요 속에서 말을 아꼈다

누가 저 줄을 맞추었을까
손이었을까,
수천 번 무릎을 꿇은 허리였을까
아니면
오랜 기다림 끝에 기억난 고향의 방식이었을까

무릎 아래 흙은 말이 없고
등 위의 하늘은 오래 지켜본다
“올해는 풍년이겠지”
이 말 한마디에
온 마을의 심장이 논에 묻혔다

새참 냄새는 아직 멀었고
허리는 굽었지만
아버지는 그날, 한 번도 힘들단 말을 하지 않았다
물이 차가우니 덜 아프다며
손끝으로 흙을 다듬었다
그러고는
자식들 이름을 속으로 부르며
모를 곧게, 반듯하게 심어갔다

모들 사이로 물은 흐르고
물 위로 하늘이 흘렀다
하늘 속에 구름이 흐르고
그 구름 속에
어머니의 잊힌 노래 한 자락이 흔들렸다

논은 거울이다
이 땅이 사람을 키운 방식,
말 없이 품고,
물 한 사발로 숨을 쉬게 한 방식
우리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논은 거울이다

한 줄, 또 한 줄
물이 먼저 길을 만들고
사람이 그 위에 생명을 올려놓는다
벼는 스스로를 자라지 않는다
바람과 비와 태양과,
그리운 누군가의 땀이 필요하다

이제 여름이 오고
논은 어느새 작아진다
풀들은 커지고
길 잃은 참새들이 날아와 쪼아대면
이마에 땀방울이 먼저 반응한다

하지만 벼는 안다
그 뿌리가 물보다 깊고
그 생이 바람보다 질기다는 것을
다만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삭이 고개를 숙일 때
비로소 한 번 흘러나올 뿐이다

그때가 되면
누구 하나 논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곳엔 다시 사람이 선다
어느 날처럼 고요히,
그리운 누군가의 이름처럼 반듯이

물이 먼저 길을 만들고
사람이 그 길을 따라
기억을 심었다
초록은 자란다
우리의 뿌리처럼,
잊힌 이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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